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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수 있다

정쿱 : 결국 이렇게 될 거





나는 가끔 최승철을 생각한다.


최승철은 아주 단단해 보이는 애였다. 그렇지만 내가 마주한 최승철은 언제나 긴 속눈썹에 눈물을 매달고 있는 채였다. 최승철은 키우던 토끼가 죽었다고 울었다. 달리기 시합에서 1등을 하지 못했다고 울었다. 자기가 공격수였는데 한 골도 넣지 못했다고 울었다. 내가 아프다고 울었다.


입천장이 데일 것 같이 뜨거운 죽을 떠먹으며 나는 최승철을 생각한다. 고등학교 삼학년의 어느 무덥던 여름, 내가 아프다는 말에 담을 넘어 본죽에서 전복죽을 사 가지고 온 단단해보이던 남자애를.


*


책상에 힘없이 엎드려 있던 내 어깨를 툭툭 친 최승철은 김이 서린 하얀색 비닐봉지를 나에게 불쑥 내밀었다. 내 짝이 자연스레 자리를 비키고, 최승철은 당연하다는 듯 내 옆에 앉았다. 풀어헤쳐진 교복 안 티셔츠가 땀으로 젖어 있었다. 8월 8일. 보충이 한창이던 여름. 최승철의 생일이었다.


“아프다며. 얼른 먹고 나아.”

“고마워.”


나는 최승철이 꺼내 준 플라스틱 용기와 일회용 숟가락을 들고 죽을 떠먹었다. 최승철은 두꺼운 손가락으로 낑낑대며 반찬 용기의 뚜껑을 열었다. 나는 입천장이 데지 않도록 죽을 후후 불며, 내리깔린 최승철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깜빡거릴 때마다 슬쩍슬쩍 보이는 흰자 부분이 빨개져 있었다.


“울었어?”


교실에 있는 애들이 다 이 쪽을 쳐다본다. 최승철은 성을 냈다. 울긴 누가 울었다고 그래! 죽을래? 물기어린 목소리였다. 나는 낄낄거리며 최승철이 열어 놓은 반찬 용기에서 장조림을 꺼내 먹었다. 짰다. 아마도 최승철의 눈물만큼이나 짰을 것이다.



하굣길에 최승철은 애들이 그렇게 많은데 그런 식으로 물으면 자기가 뭐가 되냐고 했다. 나는 뭐 어때,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쭈쭈바를 빨았다. 최승철은 별안간 멈춰서더니,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야, 왜 울어.”

“나는 네가 아프다고 그래서…….”

“별 것도 아닌데, 괜찮아.”

“됐어, 이 아저씨야. 걱정을 해 줘도,”

“승철아.”

“왜.”

“나 키스 한 번만 해 봐도 돼?”


대답도 듣지 않고 입술을 가져다댔다. 아무것도 안 발랐는데도 새빨간 입술이 언제나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보는 것만큼이나 부드러운 입술이었다. 나는 체급차이를 생각 한 건지 차마 나를 때리지도 못하고 얼어 있는 최승철을 위해 혀는 집어넣지 않고 입술을 뗐다. 아직 물기 어린 눈이 원망하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쭈쭈바를 물었다.


“야 윤정한.”

“아, 뽀뽀 좀 할 수도 있지 뭘 그렇게 유난이냐?”

“…아프다면서 왜 쭈쭈바를 먹고 그래!”

“우리 승철이 쭈쭈바 맛 났어요?”

“야!”


쭈쭈바를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최승철의 손을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잠깐 굳어 있던 단단한 손가락이 내 손등을 쥔다. 윤정한. 왜. 있잖아. 응. ……. 언제나 단단해 보이는 최승철은 내 앞에서만 물러 보였다. 나는 그게 좋았다. 걔가 우는 얼굴도 좋았다. 눈물이 최승철의 긴 속눈썹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보다 예쁜 광경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울지 않으려고 깨물어서 평소보다 빨개진 입술도. 절로 입맛이 다셔졌다. 아쉬웠다. 최승철이 나보다 반걸음 정도 뒤에서 내 손을 붙들고 걸어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불쑥 몸을 돌렸다. 최승철이 턱을 살짝 치켜들고 나를 본다. 나른한 눈이었다. 울어서 빨개진, 나른한 눈. 좁은 골목길 벽으로 최승철을 밀었다. 단단한 몸이 속절없이 골목길 벽에 가 붙는다. 나는 쭈쭈바를 내려놓고 최승철의 입술을 물었다. 조금 전보다 더 세게. 아직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자 최승철의 입술이 열렸다. 막무가내로 혀를 밀어 넣었다. 첫 키스는 아닌데, 좀 급했다. 혀가 얽히고, 나는 사정없이 최승철의 입 안을 헤집었다. 빨아들였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윽. 최승철이 신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내리깔린 최승철의 속눈썹이 심각하게 가까웠다. 얘랑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정한.”


최승철이 힘을 주어 나를 밀었다. 진짜로 힘을 쓰는 최승철은 나도 당해낼 재간이 없어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부어오른 입술을 혀로 핥는 최승철은 그게 얼마나 야한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교복 바지에 흘러내린 쭈쭈바가 묻어 끈적끈적해진 걸 이제야 깨달았다. 아, 좆같네. 인상이 찌푸려졌다. 최승철은 진지한 표정을 하고 눈을 내리깐 채로(아마 내 바짓단을 보는 것 같았다.) 우물우물 입을 열었다.


난 너를 정말 좋은 친구로 생각해서, 네가 아까 그런 짓을 했을 때도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건 못 참고 있겠다. 난 옆 반 영희가 좋고, (영희는 민규 여자친구잖아.) 시끄러워. 너랑 이런 짓 하는 사이가 될 마음도 없어.


죄다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못 참고 있겠다는 놈이 내 쭈쭈바가 다 녹을 때까지 가만히 있었냐고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승철아.”

“응.”

“내일 보자.”


벙 찐 표정을 끝으로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애원하는 것처럼 보이면 안 된다. 최승철을 어떻게 해 보기 위해서는 똑똑하게 굴어야 했다. 걔는 나보다 힘이 셌다. 최승철은 다시는 내가 자기에게 이런 식으로 굴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테였다. 나를 좋아하는 주제에. 웃겼다. 부정하고 싶은 건지, 깨닫지 못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최승철은 나를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작 같은 반 남자애 하나 아프다고 울리가 없었다. 애초에 최승철이 이과를 선택한 것도 나 때문이었다. 걔가 깨달을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주기로 했다. 딱 한 달. 그 이상은 나도 곤란했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최승철은 한 달을 넘겼다. 졸업할 때까지 걔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조금 서먹한 사이가 됐고, 나는 최승철이 우는 얼굴을 보기 힘들어졌다. 걘 졸업식 날 조금 울었고, 그 전엔 반 대항 축구 시합에서 졌을 때 몰래 울었다. 시합 다음 시간이 음악 수업이었는데, 교실에 놓고 온 게 있어 들렀다가 우연찮게 봤다. 최승철은 눈물을 닦으며 멋쩍게 웃었다. 어, 윤정한. 그래도 너라서 다행이다. 나는 사내새끼가 왜 울고 그래. 딱 그 한 마디만 하고, 놓고 온 오카리나를 챙겨 얼른 교실을 떴다. 의자에 몸을 둥그렇게 말고 앉은 최승철의 뒤통수를 끌어안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


나는 가끔 최승철을 생각한다. 잘생긴 얼굴이 먼저 떠오르고, 그 다음엔 우는 얼굴이 떠오른다. 한 번만 더 키스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대학가를 지나가던 중, 저 앞에 최승철과 닮은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아니, 최승철이었다. 확신한다. 윤정한. 최승철이 먼저 성큼성큼 다가와 내 팔을 붙든다. 고등학생 때보다 더 잘생겨졌네. 최승철이 한 말이었다. 너도. 나는 예의상 짧게 답했다. 한 번에 알아봤어. 최승철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반갑다, 야.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이나 한 잔 할까? 기다리기로 결심한 한 달은 훨씬 지났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승철아.”

“응.”

“어떻게 지냈어?”

“대학 다니다가 군대 갔다 왔지, 뭐. 너는?”

“나는 네 생각 했어.”


소주병을 든 채로, 최승철이 굳었다. 나는 그 애의 손목을 턱 잡고서 씩 웃었다. 승철아, 넌 내 생각 했니?


“징그럽다. 이 아저씨야.”


한참의 침묵 뒤에, 최승철이 약간 더듬거리며 말했다.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나는 소 같은 최승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알아.”

“…….”

“나갈까?”


손목을 쥐고 있던 손을 그대로 미끄러트려 최승철의 손을 잡았다. 고등학생 때와 똑같았다. 두툼한 손바닥, 잠깐의 망설임, 결국은 내 손등을 감싸는 단단하고 두꺼운 손가락까지. 계산은 대강 하고 급하게 근처 모텔로 들어갔다. 아저씨는 익숙하다는 얼굴로 키를 내밀었다. 최승철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야, 윤정한, 야…….”

“누가 너 잡아먹는대? 웃기지 좀 마.”


물론 그럴 생각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최승철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하얀 뺨을 손에 꽉 쥐었다. 다른 손으로 단단한 등을 감쌌다. 슬쩍 눈을 뜨고 본 최승철의 감은 눈은 여전히 예뻤다. 아. 정말로, 얘랑 자고 싶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쭉. 최승철을 상상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고 나서 맞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최승철이 나를 때릴까? 아닐 것 같았지만. 사실 그래서, 하여튼, 잘 굴러가던 머리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몇 년 간 상상만 하던 날이 실제가 됐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여태 뜨고 있던 눈을 감았다. 최승철이 내 목에 팔을 감아왔다.


최승철은 아프다고 했다. 나는 못 들은 척 했다. 최승철은 이를 악 물었다. 어릴 때처럼 많이 울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이 웃겨서 좀 웃었다. 최승철이 웃지 말라고 했다. 뒤치기를 하게 해 주면 안 웃겠다고 했다. 최승철은 곧장 나를 밀어내더니 단단한 팔로 내 목에 초크를 걸었다. 최승철은 담배는 안 피운다고 했다. 의외네. 피울 것 같았는데. 내 대답에 최승철은 억울해했다. 나는 한 번 하고 나선 체력이 떨어져 그대로 침대 위에 널브러졌다. 최승철은 내 옆에 강아지처럼 앉아서 정한아, 나도 네 생각 했어. 하고 말했다. 그렇겠지. 생각나게 굴었으니까. 그 땐 안 넘어 왔지만. 나는 말 대신 웃기만 했다.


“정한아.”

“응.”

“…보고 싶었어.”


고개를 번쩍 들어 최승철의 얼굴을 확인했다. 쳐진 눈이 진짜라고, 믿어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승철아.”

“응.”

“왜 빨리 말 안 했어.”

“……무서워서.”


최승철에겐 겁날 만도 했다. 이해한다. 나는 몸을 일으켜 최승철의 하얀 몸을 꼭 끌어안았다.


“나도 보고 싶었어, 승철아.”


맨 어깨 위로 뚝뚝, 눈물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