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잠바였다. 초겨울에 가죽잠바는 그렇게 특별한 아이템이 아니었지만 입은 사람이 매일 까치집 지은 머리를 긁적이며 슬리퍼나 직직 끌고 다니던 동네 겜돌이라는 게 문제였다. 한솔은 그만 들고 있던 츄파춥스 초콜릿 맛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대박. 겜돌이 형이 가죽잠바 입었어. 한솔은 겜돌이, 그러니까 원우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후에야 느리게 떨어트린 사탕을 주웠다. 아직도 한솔은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맨날 노랗게 변한 흰 티에 무릎 나온 회색 츄리닝을 입고 새벽부터 늘푸른 피씨방으로 출석체크를 하는 사람이 가죽잠바라니. 가죽잠바에 충격 받아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머리도 말끔하게 만진 것 같았다. 그렇게 하고 있는 걸 보니까 제법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한솔은 등교시간에 매일같이 피씨방에 가는 동네 형을 꽤 한심하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
원우는 자기 신장의 반만큼도 안 되는 오락기 앞에 몸을 잔뜩 쭈그리고 앉았다. 옆에선 승철이 펌프 기계 위에서 날아다니는 중이었다. 원우는 발이 안 보이게 뛰고 있는 승철을 잠깐 보다 8비트 비지엠이 흐르는 오락기로 고개를 돌렸다. 원우는 테트리스 마니아였지만, 오늘 그가 선택한 게임은 보글보글이었다.
모처럼 휴강이 떴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승철은 원우에게 오락실에 가자고 메시지를 보냈고, 원우는 흔쾌히 승낙했다. 기말이 바로 다음 주였기 때문에 공부하라고 내 준 시간이었지만, 한창 레트로 게임에 빠져 있는 두 사람에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원우는 컨트롤러를 손에 쥐고 찔려오는 양심을 애써 모르는 척 했다. 하루쯤은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원우는 오락기에 오백 원짜리 두 개를 더 밀어 넣었다.
원우가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 보글보글 마지막 판까지 다 깼을 때, 승철은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숨을 몰아쉬는 중이었다.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본 원우가 승철과 눈이 마주치자, 승철이 혀로 입술을 쓸며 씩 미소 지었다. 아. 원우는 당장 고개를 돌리고 이번엔 테트리스를 시작하고 싶었지만 이미 승철과 눈이 마주친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원우는 벌써 펌프 기계 위에 올라가 있었다.
“형 저 진짜 못해요.”
“해야 늘지!”
“안 하고 싶은데 왜 해야 돼요.”
“펌프 간지 쩔어.”
“저는 안 해도 간지 쩔어요.”
“원우야~ 뭐 해볼래?”
“……컴백이요.”
원우는 발판을 느리게 밟으며 펌프는 하는 게 아니었다고 생각했다(물론 본인의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원우의 몸은 빠른 리듬과 잘 하고자 하는 욕심을 따르기엔 너무 느렸다. 원우는 지금껏 남들보다 한 박자 느린 자신의 리듬에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화면에 커다랗게 표시된 알파벳 F를 보며 원우는 절망했다.
“아 진짜……너무 어렵다.”
“해야 늘지. 나도 처음엔 못했어.”
“형은 중학교 때부터 했다면서요.”
“뭔 상관이야. 한 판 더 할까?”
“아 난 안 돼.”
승철은 펌프 기계 위에서 내려가는 원우의 어깨를 툭 치고 새로운 곡을 고르기 시작했다. 테트리스 해야지. 오락기로 걸어가는 원우는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보였다.
*
치킨에 맥주 딱 한 잔만 하자던 승철은 치킨집에서 소주 세 병을 스트레이트로 비웠다. 원우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 승철 옆에서 분위기만 맞췄는데도 몸에서 은근히 알코올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아, 지금 고딩들 하교 시간인데. 괜히 얼굴을 내려 냄새를 맡아 본 원우가 인상을 썼다.
한솔은 교복 셔츠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이고 씩씩거리는 승관의 옆에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승관은 옆 반 애들이 한솔에게 뭐라고 한 걸 가지고 자기가 더 나서서 성질을 냈는데, 아직까지 분이 안 풀린 모양이었다. 초겨울이라고 해도 바람이 제법 쌀쌀했기 때문에 한솔은 승관에게 몇 번이나 셔츠는 내릴 것을 권유했지만 승관은 마지막엔 짜증까지 내며 아직 덥다고 셔츠를 잡고 펄럭였다. 자기 딴엔 걱정돼서 한 말이었는데, 돌아온 게 성질이라 한솔은 티는 안 냈지만 약간 속상했다. 상대가 평소엔 한솔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승관이어서 더욱 그랬다. 승관은 갑자기 급격히 말이 없어진 한솔의 눈치를 보다 은근슬쩍 셔츠를 내렸지만, 한솔은 승관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 큰일 났다. 어떻게 한솔의 기분을 풀어줄지 고민하던 승관의 옆을 지나간 건, 술 냄새를 풀풀 풍기는 원우였다.
“아, 술 냄새 쩔어. 그지, 한솔아?”
“어?”
“술 냄새 쩐다고. 저 아저씨.”
승관이 원우가 걸어간 쪽으로 손짓했다. 대체 뭔데 갑자기 그러나 싶어 뒤를 돌아본 한솔과, 술 냄새 쩐다는 말을 듣고 저건 뭐하는 새낀가 싶어 멈춰서 승관의 뒤통수를 빤히 보고 있는 원우의 눈이 마주쳤다. 한솔은 깜깜한 밤에도 형형한 원우의 눈빛을 마주하고 그런 말을 한 건 자신이 아니라는 눈빛을 강하게 보냈으나, 원우는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한솔은 빠르게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 뭐라고 중얼거리는(어후 술 냄새 무슨 이 시간에 고등학교 앞 지나가면서 술을 저렇게 마셨대? 어휴 뭐하는 사람일지 정말) 승관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야, 그만해.”
“어?”
“저 형이 너 쳐다 봐.”
“헐.”
그저 한솔과의 얼어붙은 분위기를 풀고 싶었지 지나가는 동네 사람에게 시비를 걸 마음은 없었던 승관이 입을 다물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게다가 그 사람에게서 나는 술 냄새가 그렇게 짙은 것도 아니었기에, 승관은 혹시나 맞지는 않을까 싶어 잔뜩 굳어 몸을 움츠렸다. 한솔아, 어떡해? 한솔은 한숨을 쉬며 승관의 팔을 잡아끌었다. 빨리 가자. 뛰다시피 걷던 한솔이 슬쩍 뒤를 돌아봤을 때 원우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한솔은 잡았던 승관의 팔을 놓고 까치집 지은 동네 겜돌이 형과 술 냄새를 풍기는 가죽 잠바를 입은 남자에 대해서 천천히 곱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꽤 흥미로운 일이었다.
승관은 헤어지기 직전의 갈림길에 서서 평소처럼 대강 손 인사를 하고 집으로 가려는 한솔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무리 봐도 친구가 좀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승관은 한솔보다 한솔을 더 잘 알았다.
“솔아.”
“왜.”
“너 저 아저씨 알아?”
“어. 아저씨 아니야. 나 초등학교 다닐 때 이 동네 이사 온 형인데.”
“아는 사이야?”
“아니. 왜?”
승관이 한솔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원래 거짓말을 하는 애는 아니었지만, 거짓말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승관은 한솔에게 너 좀 이상하다는 말을 하려다 삼켰다.
“아니, 아는 것 같길래.”
“걍, 등하교 할 때 가끔 마주쳐. 저 형이 해코지 할까봐 걱정 돼?”
“어? 어……. 졸라 무섭던데.”
“아냐. 착해. 우리보다 두 살 많고 걍 겜만 하는 사람 같던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피해 다녀야겠다.”
참 나. 한솔이 코웃음 치며 승관의 어깨를 툭 쳤다. 얼른 가. 졸려. 승관은 한솔을 등지고 집으로 걸어가며 고개를 갸웃했다. 꼭 한솔을 잘 알아서가 아니더라도, 승관은 분위기에 민감했다. 오늘의 한솔은 확실히 이상했다. 술 냄새 나는 아저씨, 혹은 형과 마주치고 나서, 승관은 어쩐지 한솔이 좀 들뜬 것 같다고 느꼈다. 확실히, 한솔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
“형 또 게임해요?”
동방 문을 벌컥 연 민규가 들어오기도 전에 짜증난다는 얼굴을 했다. 원우는 민규를 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존나 당연한 일이었다. 원우는 육상 동아리 방에서 맨날 게임만 했다. 원우는 일 년에 딱 두 번만 달렸다. 민규는 문을 닫고 소파에 털썩 앉더니 핸드폰을 꺼냈다. 사실 민규도 달리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민규는 항상 동방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만 했다. 원우는 민규가 대체 누구와 그렇게 카톡을 주고받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원우는 남이 보낸 카톡을 보통 씹는 쪽이었다. 민규는 보내는 쪽임이 분명했다. 원우가 아무리 씹어도 민규는 원우에게 카톡을 보냈으니까. 원우는 마우스를 달칵이며 민규가 이제 그만 카톡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 김민규 진짜.”
하지만 민규는 보냈다. 원우는 노트북 화면 아래에 뜨는 카톡 알림을 보고 짜증을 내며 쓰고 있던 헤드폰을 벗었다. 김민규 때문에 이번 판은 망했다. 원우는 노트북을 덮고 민규를 째려보았다. 민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혀를 내밀었다. 그러게 누가 게임만 하래요? 지는 카톡만 하는 주제에 아주 당당했다. 원우는 결국 두꺼운 게임용 노트북을 가방에 집어넣고 책상에 엎드렸다. 원우는 게임을 안 할 때는 잤다. 침대도 있었지만 원우는 항상 책상에 엎드려서 잤다. 왜냐하면 침대에는 항상 누가 원우보다 먼저 와서 누워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우는 아직 그 선배와 친하지 않아서, 침대가 2인 이상이 누워도 될 정도로 넓었음에도 불구하고 옆에 눕지 못했다.
생긴지 4년도 안 된 육상부 동방이 슈퍼싱글사이즈 침대가 들어갈 정도로 넓은 건 동아리 회장인 승철의 힘이 컸다. 승철은 다시 동아리 연합 회장이던 지훈과 막역한 사이였고, 소주 한 병이 주량인 지훈에게 소주 세 병을 먹이고 가장 넓은 동아리방을 따냈다. 원래 그 방을 쓰던 서양화 동아리는 갈 곳을 잃고 학생회관 구석에 박혀 창고처럼 쓰이던 방으로 쫓겨나야 했다.
민규는 지긋지긋한 회색 후드를 덮어 쓰고 잠든 원우를 정말이지 한심하다는 얼굴로 쳐다보다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원우는 육상부의 유일한 이과생인 정한―매일 침대에 누워 있는 그 선배였고, 민규는 그와 제법 친했다―보다 패션 센스가 구렸다. 원우는 항상 학교에 올 때 꾸밀 이유가 없다고 대꾸했지만 민규가 볼 땐 변명에 불과했다. 민규는 원우의 옷장에 후드와 청바지밖에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물론 그건 아니었다.
승철은 민규가 보낸 원우의 사진을 보고 박장대소했다. 전원우 이 새끼 또 회색 후드 입었어. 승철은 원우의 옷장에 가죽 잠바와 회색 후드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이것도 아니었지만, 민규보단 나았다. 원우는 승철과 민규가 어떤 메시지를 주고받는지도 모르고 쿨쿨 잤다. 원우의 꿈엔 게임 속 한 장면이 나왔다. 아, 게임 끊고 공부해야 하는데. 원우는 꿈을 꾸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승철과 민규를 옆에 두고 시험기간 3주 전부터 공부를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원우는 느리게 눈을 뜨며 얼른 이 동아리에서 탈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야, 원우야, 그 옷 좀 버려라.”
마침 승철이 낄낄대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원우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잠긴 목소리로 느리게 말했다.
“형. 나 탈퇴할래.”
“뭐라고? 방탈출 하러 가자고?”
시발.
원우는 안대를 쓰고 승철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린 채로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원우가 힘으로 승철을 이기기란 불가능했다. 승철은 원우의 가는 팔목을 휘어잡고 곧장 버스에 올랐다. 마침 내가 예약을 해 뒀지! 원우는 승철의 손에 이끌려 지갑을 카드 리더기에 태그하며 민규를 데려가면 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승철은 걔 수업 있대, 하고 말을 잘랐다. 원우는 자신도 토플 수업을 들으러 가야 한다고 말했지만 승철은 듣지도 않고 빈자리에 원우를 앉혔다. 원우는 좁은 방 안에 갇혀서 줄어드는 전자시계의 숫자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형. 꼭 해야 돼?”
“어. 이거 새로 나온 테마야. 꼭 해야 돼.”
“그냥 한 시간 있으면 알아서 푸는 방법 알려주잖아.”
“원우야.”
원우는 승철이 고작 방탈출을 하기 싫다고 했다고 자신을 때릴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착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원우는 자리를 잡고 앉아 힌트를 풀기 시작했다. 원우는 방탈출보단 배틀그라운드 쪽이 좋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원우는 탈출하고 싶었다. 좁고 답답한 이 방과, 지옥의 게임왕 최승철에게서.
탈출은 못 했다. 원우는 넋이 나간 채로 직원의 해설을 들었다. 승철은 눈을 반짝이며 듣고 있었지만 원우는 얼른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다. 원우는 회색 후드를 덮어쓰고 대체 자신이 오늘 무엇을 했는지 되짚으며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원우는 얼른 씻고 나서 이불 속에 들어가고 싶었다. 게임이고 뭐고 다 지쳤다. 원우에겐 휴식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헐. 저 아저씨 그 사람 아니야?”
동네 고딩이 시비 터는 것 정도는 가뿐히 무시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승관은 한솔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가며 아무리 봐도 그 때 그 술 냄새를 풍기던 남자가 맞는 것 같다고 (원우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속삭였다. 한솔은 원우의 표정을 확인하려 눈동자를 굴렸지만 원우가 후드를 덮어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한솔은 그냥 승관의 입을 막았다. 승관이 에베베 하고 한솔의 손바닥에다 침을 발라서, 한솔은 당장 손을 떼고 승관의 교복에다 그걸 닦고 싶었지만, 손을 떼는 순간 승관이 점점 가까워지는 원우에게 삿대질을 하며 ‘청소년 교육에 안 좋으니 술 마시고 하교시간에 돌아다니지 마세요!’라고 할 것만 같아 그러지 못했다. 원우는 그럴 생각이 없었으니 한솔은 1초라도 빨리 손을 떼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원우는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옆에 누가 지나가는지도 보지 못했다. 원우는 후드를 덮어쓰고 얼른 쉬고 싶다는 생각만 하며 터덜터덜 걸었다. 한솔은 원우가 너무 지쳐 보인다고 생각했다. 맞았다. 한솔도 누가 제멋대로 자신을 끌고 가 하기 싫다는 방탈출을 시킨다면 잔뜩 피곤한 얼굴로 집에 돌아갔을 것이다. 한솔은 자기도 모르게 승관의 입을 막았던 손을 떼고 고개까지 돌려가며 원우의 뒷모습을 보았다.
“야, 최한솔. 최한솔!”
승관이 한솔의 어깨를 툭툭 치지 않았다면 한솔은 원우가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계속 그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승관은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아, 최한솔, 설마. 그럴 리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승관은 알고 있었다. 뭔가 확실히 변하고 있었다.
*
원우는 또 승철의 손에 끌려 당구장에 갔다가 당구만 열 판을 넘게 치고 눈을 반쯤 뜬 채로 집에 기어 들어가는 길이었다. 저녁 일곱 시 쯤 당구 치다 먹은 짬짜면 그릇에 든 짜장면이―짬뽕은 승철이 탕수육과 함께 다 먹었다― 오늘 식사의 전부였던 그는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를 움켜쥐고 자기도 모르게 학교 다닐 때 자주 가던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떡볶이 3인분을 주문한 원우는 새삼스럽다고 생각했다. 떡볶이는 원우가 아니라 순영이 좋아했던 거였다. 원우는 떡볶이보단 김치볶음밥이 좋았다. 학생, 오랜만이네. 주인아주머니가 거침없이 떡볶이를 퍼 접시에 담으며 인사를 건넸다. 원우는 대강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째 승철에게 끌려 다닌 원우는 가벼운 안부 인사에 정성들여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원우는 입구를 등지고 앉아 떡볶이를 우적우적 먹었다. 원우는 역시 김치볶음밥이 더 맛있다고 생각하며 계란을 반으로 갈라 노른자를 국물에다 야무지게 비볐다. 이것도 권순영이 좋아했던 건데. 순영은 태권도 도장에서 알바를 하느라 영 바쁜 모양이었다. 그래봤자 요 위에서 하면서. 원우가 입을 삐죽이며 계란 노른자를 떠서 먹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냄새가 났다. 땀 냄새가 섞인 시원한 향수 냄새. 원우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왼손을 들었다. 원우만큼이나 작은 손이 원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전상, 여기서 혼자 뭐 하냐?”
“떡볶이 먹지. 배고파서.”
“승철이 형이 너랑 당구 쳤다던데.”
“야, 죽겠어.”
순영이 원우의 맞은편에 앉으며 캬하하 웃었다. 그럴 만도 하지. 원래 승철이 끌고 다니던 건 지훈이었는데, 최근 지훈이 작업 때문에 바빠지자 원우가 그 자리를 대신해야 했다. 원우는 정말 죽을 지경이었다. 순영은 알바가 있고, 민규는 시간표를 개같이 짠 데다 정한은 침대에 누워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으니 그나마 제일 한가하고 덜 자는 원우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원우는 처음에 같이 게임할 사람이 생겨서 좋았으나, 점점 액티브한 활동을 하는 횟수가 잦아지자 승철을 감당하기 조금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순영은 원우가 느리게 늘어놓은 한탄을 들으며 떡볶이를 냠냠 먹었다.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고, 어떡하냐, 같은 추임새도 넣어 가면서. 원우는 마지막으로 오뎅을 입에 넣고 포크를 내려놓으며 순영이 와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원우 혼자 3인분을 다 먹는 건 역시 무리였다. 원우는 순영이 볼이 빵빵해지도록 떡볶이를 먹는 걸 구경하며 물이나 홀짝였다.
간만에 혼자 하교하는 길이었다. 한솔은 이어폰을 끼고 느리게 걸었다. 승관과 함께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승관은 언제나 한솔의 이어폰 한 쪽을 빼고 귀에 대고 말을 했고, 한솔이 느리게 걸을 때면 그의 손목을 잡고 끌었으니까. 그게 싫다는 건 아니었지만, 한솔에게도 여유가 필요했다.
나 없으니까 심심하지?
확실히 아프다고 먼저 조퇴한 애가 보낼 문자는 아니었다. 한솔은 그냥 웃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승관과 석식 시간에 자주 가던 분식집 앞을 지나던 한솔은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어. 작은 분식집에 구겨져 앉아 있는 사람은 분명 동네 겜돌이 형이 분명했다. 한솔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왜 멈췄지. 와중에 벨이 울려서 전화를 받자 승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귀에 박혔다.
야 최한솔! 왜 답장 안 해!
“딱히 할 말이 없잖아.”
그럼 키키키키 라도 보내야지!
“알았어…….”
한솔은 느리게 걸으며 핸드폰을 꺼내 승관의 말대로 딱 키읔 네 개를 쳐서 전송했다. 아아아악!!!!! 한솔은 도무지 승관이 소리를 지르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반은 네가 내라.”
“야, 내가 먹어줬는데 계산은 당연히 네가 하는 거 아니냐?”
“뭔 소리야.”
“좀 해 줘.”
“담엔 네가 사.”
“아, 전원우 사랑해!”
승관의 비명소리 너머로도 남자들이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솔은 홀린 것처럼 고개를 돌렸고, 이번엔 검은색 후드를 덮어쓴 원우와 눈이 마주쳤다.
최한솔! 듣고 있어?
“어?”
듣고 있냐고!
“뭐라고 했어? 미안.”
승관이 보고 있지도 않은데 두 손을 모아 사과한 한솔이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좀 빨랐다. 한솔은 거의 뛰고 있었다. 승관은 빨라지는 한솔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최한솔, 너 뛰어? 하고 물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솔은 어? 어. 하고 정신없이 대답했다. 마주친 남자의 눈이 꼭 늑대의 그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너 이상해.
한솔은 승관의 말에 수긍해야 했다. 어. 나 이상해. 승관아, 왜 이러지? 승관은 대답하지 않고 주제를 돌렸다. 나 없이 야자 잘 했어? 석식 잘 먹었어? 담임이 뭐래? 뭐 해 갈 거 있어? 한솔은 승관의 물음에 대강 대답하면서도 대화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숨이 가빠오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까 뛰지 말 걸. 한솔은 자꾸 떠오르는 그것 때문이 아닐 거라는 문장을 저 깊은 곳으로 꾹꾹 누르며 승관과의 통화에 집중하려 애썼다.
“어……뭐라고?”
석식에 나온 짜장밥 맛있었냐고 세 번이나 물었잖아. 너도 아파? 나한테 감기 옮았어? 너 왜 그래?
한솔은 울상을 짓고 승관에게 짜장밥 맛있었다고, 아무래도 영양사 선생님이 드디어 학생들의 의견을 수용한 것 같다고 대답했다. 나 왜 이러지, 진짜로. 그러면서도 자꾸만 승관의 목소리가 아득해지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한솔은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