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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수 있다

정쿱 : He'll be okay

쿱른 교류회 가지고 갔던 글 첫 부분입니다.







승철은 제법 성실한 보험 판매 사원이었다.

*

“고객님, 이 상품은요…….”

“오빠는 한 달에 얼마 내면 돼요?”

“네?”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승철의 눈동자는 순간 갈 곳을 잃고 아직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정한의 커피 잔에 멈췄다가 금세 정한과 눈을 마주했다. 우수한 보험 판매 사원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간단하다. 고객의 눈을 바라볼 것. 두 번째는 절대 시선을 피하지 말 것. 세 번째는 고객의 시선을 붙잡을 것. 그리고 승철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고 판단했다. 정한은 분명히 ‘오빠는 한 달에 얼마 내면 되’냐고 물었다. 이제 ‘오빠’가 누구인지 생각할 차례였다. 이 테이블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다. 성실하고 실적 좋은 보험 판매 사원인 남자 최승철과, 승철이 수백 통의 전화를 돌린 끝에 겨우 약속을 잡은, 대학 때 몇 다리 건너 알던 남자 윤정한. 승철은 형이 한 명 있고, 정한은 여동생이 한 명 있다. 정한이 오빠일 가능성은…….

“오빠는 한 달에 얼마 내면 나 만나 줄 거냐고요.”

승철은 사실 머저리가 아니었다. 열심히 현실을 도피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거 가입하시면, 만나드릴게요.”

동시에 아주 성실한 사원이기도 했다.

정한은 망설이지도 않고 승철이 내민 가장 최근에 나온 상품의 계약서에 이름을 적어 넣기 시작했다. 약관 같은 건 제대로 읽지도 않았다. 승철은 정한의 번호를 알려주며 고개를 갸웃하던 선배의 표정을 모른 척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실적에 눈이 멀어 소문이 무성하던 애의 번호를 받는 게 아니었다. 소문의 주인공은 둘이었다.

“일단 오늘은 영화부터?”

광홍 윤정한 체육 최승철 좋아한다잖아.

“…….”

승철은 계약서를 파일에 집어넣으며 자기도 모르게 울상을 지었다. 정한이 눈썹을 치켜 올리고 못마땅하다는 얼굴을 한다.

“계약 했잖아요. 오빠 하나 믿고.”

​“저는 라라랜드요.”

승철이 생긋 웃었다. 정한은 망설임 없이 앱을 열어 티켓을 예매했다.

*

지훈이 숟가락을 쾅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승철은 조금 움찔했으나 쫄았다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아 태연한 얼굴로 우동을 건져 먹었다.

“선배 미쳤죠.”

여전히 사투리가 조금 섞인 말투로, 지훈이 승철을 빤히 쳐다보았다. 승철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다 생각이 있어. 지훈은 승철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코웃음을 쳤다.

“걔 선배 좋아한다잖아요.”

“나도 먹고 살아야 할 거 아냐.”

“그래서 둘이 라라랜드 보고 스테이크까지 썰었어요?”

“어, 그래서 지금 느끼해가지고 너랑 소주 마시고.”

“잘났다.”

지훈이 병나발을 불 기세로 소주병을 들었다. 너 술 못 마시잖아. 승철이 나지막이 내뱉은 말에 금세 내려놓긴 했지만. 지훈은 윤정한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열불이 났다. 별 그지 같은 소문으로 승철의 대학 생활까지 반쯤 망쳐 놓은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그 인간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었다. 지훈이 없었다면 승철은 대학생활 내내 호모 꼬리표를 떼지 못했을 것이다. 진짜 호모면 억울하지나 않지. 열이 올라 패딩까지 벗었던 지훈이 스웨터 목덜미를 잡고 펄럭였다.

“지훈아, 영화 재밌더라. 작년에 볼 걸 그랬어.”

짜증나게 시뻘건 입술을 우물거리는 얼굴을 보고,

“선배, 진짜 호모예요?”

지훈은 자기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아까 마신 소주 두 잔이 원흉임에 틀림없었다. 뇌에서 떠오른 문장이 필터링 없이 입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어?”

승철은 멍청하게 되물었다. 길고 새까만 속눈썹을 깜빡이며, 술 때문에 촉촉해진 빨간 입술을 쓸데없이 혀로 한 번 쓸면서, 매서운 칼바람에 빨개진 뺨과 코끝을 감추려 둘둘 감은 목도리에 얼굴을 조금 더 파묻으면서.

“선배 씨발 진짜 남자 좋아하냐고요.”

“뭔 소리야.”

“윤정한이랑 사귈 거예요?”

“어?”

“아 지금 선배가 윤정한이랑 데이트 한다며!”

그게 데이트인가. 승철은 기계적으로 잔을 채우며 곰곰이 생각했다. 정한은 계약 조건으로 일주일에 한 번 만날 것을 제시했다. 잘만 하면 다른 상품 계약도 고려해 본다고 했다. 승철은 돈을 벌고 싶었고, 돈을 벌어서 지훈과 고기랑 술을 사 먹고 싶었다. 정한은 꽤 잘 나가는 광고 회사의 대표였고, 따라서 보험 몇 개 정도는 부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승철은 제안을 승낙했다.

“그거 데이트 아니야.”

“데이트지, 멍청아.”

“야, 그렇다고 반말을…,”

“됐어요. 그 긴 머리 변태새끼랑 잘 붙어먹으세요.”

“정한 씨 이제 긴 머리 아닌데.”

“예에~”

지훈은 애꿎은 우동 그릇만 힘줘서 뒤적였다.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겨울바람이 히트텍도 없이 맨살에 스웨터만 입은 지훈의 몸을 통과해 지나가는데도 자꾸만 얼굴이 달아오르고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 지훈은 시뻘게진 얼굴을 푹 숙이고 승철이 채워놓은 잔을 가져다 비웠다. 소주는 오늘따라 더 맛이 없었다.


승철은 지훈이 왜 성을 내는지 모를 일이었다. 승철은 돈을 벌어 좋고, 지훈은 승철에게 고기를 얻어먹어서 좋고, 정한은 다쳤을 때 보험금이 나오니 셋 모두에게 좋은 일 아닌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대학 때 친구를 만나는 것도 나쁘진 않고. 안 그래도 지훈은 자기만 만나지 말고 친구 좀 만들라고 몇 번이나 말 했던 터라 승철은 지훈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우습게도, 승철 또한 지훈에게 너 왜 그러느냐고 묻지 못했다.

‘선배 씨발 진짜 남자 좋아하냐고요.’

윤정한과 이지훈의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다.

*

정한은 대뜸 장갑을 건넸다. 가죽이에요. 좋은 거. 생긋 웃는 얼굴은 천사 같았다. 승철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장갑을 손에 꼈다.

“주머니에 손 넣지 말고 나랑 손잡아요.”

“우리 데이트 하는 거예요?”

“네.”

승철의 손을 잡은 정한의 손도, 정한의 표정도 모두 단단했다. 승철은 떨떠름한 얼굴로 남은 손을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나 호모 아닌데. 옆집 세희가 나한테 시집 온댔는데.

“손 좀 놓으면 안 돼요?”

“계약 파기할 거예요.”

알 만한 사람들은 알았지만, 정한은 협박과 으름장의 귀재였다. 승철은 한 번 더 참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승철은 정한과 손을 잡고 게임방으로 들어갔다. 정한은 승철을 잘 알았다. 그는 대학 시절 내내 승철의 이야기를 듣고 살았다. 직접 접근한 적은 없지만 정한은 언제나 승철의 주변에 있는 사람과 친분을 유지하며 지냈다. 딱 한 사람만 빼고. 그 쪼끄맣고 싸가지 없는 애. 정한은 언제나 지훈을 그렇게 불렀다.

“어, 펌프다.”

“펌프 잘 해요?”

“좀 하죠.”

좀 하는 정도가 아니라 승철은 펌프의 신이었다. 정한은 팔짱을 끼고 승철의 발이 기계 위에서 날아다니는 걸 감상했다. 정한은 딱히 게임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지만 승철이 하고 싶어 하는 건 모두 함께 해 줬다. 보글보글이나 테트리스 같은 유치한 고전 게임부터 어지러워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시뮬레이션 게임까지. 정한은 조급해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기초부터 쌓아나갈 생각이었다. 몇 년 간 눈독만 들이던 최승철이 제 발로 찾아왔으니, 이제 정한도 멀리서 지켜보는 건 관둘 생각이었다. 좀 치사하긴 했다. 정한도 알고 있었다.

“승철 씨.”

“네.”

“아직 그 친구랑 친해요?”

“누구요?”

“이…….”

“지훈이요?”

정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친하죠.”

너무 당연해서 자존심이 다 상할 지경이었다. 정한은 저번 주에도 같이 우동에 소주 한 잔 했다는 승철의 말을 들으며 최대한 태연한 척 굴었다. 그렇지만 승철의 손을 잡은 손에 자기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아프다며 손을 빼는 승철의 손을 하는 수 없이 놓아 주고, 꽁꽁 언 손을 얇은 코트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정한은 조금 허망한 얼굴을 했다.

제 딴에는 배려였다. 그러니까, 대학 때 승철에게 접근하지 않은 것 말이다. 너 바보짓 했다니까. 지수가 몇 번이나 한 말이 생각났다. 그러게, 나 바보네. 들이대기라도 해 볼 걸 그랬다. 이미 온 학교에 소문을 퍼트려 자신은 물론이고 승철까지 곤란하게 만들어놓고 대체 뭘 그렇게 배려했는지. 어떻게 보면 배려도 아니었다. 승철에게 직접적인 접촉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승철까지 학교생활을 제대로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지훈이 정한만 보면 좆같다는 표정을 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정한이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거리엔 벌써부터 캐롤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지훈은 패딩 모자를 덮어쓰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상경한지 벌써 10년이 가까워지는데도 서울의 겨울은 추웠다. 그럴 바엔 눈이나 실컷 보고 싶다고, 지훈이 코를 들이마시며 생각한다. 군대에 있을 땐 눈이라면 지긋지긋했는데 사람 마음이 참 이렇다. 많이 가난한 게 흠이었지만, 지훈은 그래도 낭만을 먹고 사는 음악가였다.

“어, 선……!”

선배. 분명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말이다. 지훈은 익숙한 뒷모습 옆에 선, 역시나 익숙한 뒷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윤정한. 확실했다. 대학시절 승철만큼이나 지훈과 자주 부딪혔던 인간이었다. 늘 쳐웃기만 하던 재수 없는 인간은 나이가 들어서도 마찬가지인지 뒤에서 봐도 광대가 한껏 올라가 있었다. 지훈은 입술을 깨물었다. 멍청하게 서 있는 자신이 이렇게 초라하게 느껴진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지훈은 인정해야 했다.

“아, 씨. 망했다.”

자신이 끔찍하게 싫어했던 윤정한과 다를 바가 없다고. 지훈 또한, 승철을 좋아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