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쿱 : 큰일
정쿱전력 : 그냥 가만히 있을 상황은 아닌데
삼학년 때 전학을 가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지만, 아예 지역을 벗어나게 된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올해는 유난히 더웠고, 나는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린 교실에 앉아 있으면서도 꽤 지쳐 있었다.
“안녕. 네가 정한이야?”
최승철은 약간 덥수룩한 검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내 앞에 와 섰다. 앞자리 의자를 빼 나를 보고 털썩 앉은 최승철은, 자기가 이 반의 반장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궁금한 게 있으면 자기한테 물어보라며, 최승철이 내 필통에서 샤프를 꺼내더니 책상에다 숫자들을 끼적였다. 내 번호야. 쑥스러운 듯 웃으며, 최승철이 샤프를 내려놓는다. 나는 이번에도 가만히 최승철을 보고 있기만 했다. 최승철은 머쓱한 얼굴을 했다. 난 걔가 그냥 흥미를 잃고 갈 줄 알았는데, 최승철은 금세 웃는 얼굴을 하며 말했다.
“너 되게 말이 없구나.”
난 걔가 좀 마음에 들었다.
*
최승철은 눈이 컸다. 얼굴의 삼분의 일은 눈인 것 같았다. 걘 속눈썹도 길었다. 긴 속눈썹이 싫어서, 어릴 때 가위로 자른 적도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금방 다시 길어졌다고, 최승철은 포기한 듯 털어놓았다. 나는 걔 속눈썹이 짙고 길어서 좋았다. 우리는 어쩌다 짝이 됐는데, 수업 듣기 싫을 때 걔 눈이 느리게 깜빡이는 걸 보고 있으면 시간이 금방 갔다.
최승철은 수업 시간에 자주 잤다. 공부엔 취미가 없다고 했다. 나는 그런가보다 하고 수학 문제를 풀었다. 공부에 취미가 없는데 왜 이과에 왔어? 문득 생각나서 샤프를 내려놓고 묻자, 최승철은 머리를 긁적였다. 사연이 좀 길어…. 최승철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해준다고 했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샤프를 쥐었다.
최승철은 축구를 좋아했다. 쉬는 시간만 되면 누구보다 빨리 뛰쳐나가서 운동장을 누볐다. 나는 가끔 창문 밖으로 최승철이 축구하는 걸 보곤 했다. 가끔 선생님들이 쉬는 시간까지 이어서 수업을 할 때면, 최승철은 시무룩한 얼굴로 이마를 책상에 박곤 했다. 나가서 공차고 싶다. 시간이 갈수록, 최승철이 내 공책에 휘갈겨 쓴 문장들이 늘어났다. 어쨌든 우리는 삼학년이었고, 진도는 아무리 해도 빨라지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최승철은 운동장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최승철의 허벅지는 굵고 탄탄했다. 이건 걔가 축구를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일 것이다. 최승철은 운동을 좋아했다. 걘 워낙 어릴 때부터 이랬다며, 뭐가 먼저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내가 신기해하며 허벅지를 꾹꾹 누르면, 최승철은 눈을 접어 웃으며 허벅지에다 힘을 주곤 했다. 허벅지는 순식간에 단단해졌다. 나는 볼품없는 내 다리를 내려다보고, 괜히 최승철의 다리를 아프게 찔렀다.
큰일이다. 요즘 자꾸 최승철 생각만 한다.
*
“빵 먹고 싶다.”
“뭐라고? 천 원으로 빵 사오고 오만 원 남겨 오라고?”
“아, 진짜!”
최승철이 의자에서 팔짝 뛰어오르며 성을 냈다. 나는 낄낄 웃다가 펼쳐 놓고 한 장도 넘기지 않은 문제집을 덮어버렸다. 최승철이 빵 사러 가자고 어깨에 매달려 애교를 부린다. 최승철은 집에서 막내라 그런가 애교가 많았다. 막상 시키면 엄청 창피해 하는 주제에. 자기가 애교가 많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승철이 아, 역시 윤정한. 한다.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서 지갑을 꺼냈다. 천 원으로 빵 사고 오만 원을 남겨 줄 순 없지만 빵 오만 원어치는 사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매점 가는 길에, 순영이가 형! 하고 아는 척을 했다. 최승철은 순영이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지훈이를 찾았다. 지훈이는? 최승철이 말하자마자 순영이 뒤에서 지훈이가 쓱 얼굴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얘넨 최승철 때문에 알게 됐는데, 귀여운 애들이었다. 그렇지만 최승철이 나랑 매점 가던 길에 얘들한테 정신을 뺏기고 있는 게 싫어서, 나는 최승철이 입고 있는 체육복 팔꿈치께를 잡아당겼다. 가자. 아, 맞다. 최승철이 씩 웃었다. 웃는 게 예뻐서, 짜증은 내지 않기로 했다.
최승철에게 빵 다섯 개랑 우유를 사줬다. 최승철은 봉투를 손목에다 걸고 단팥빵부터 깠다. 복도를 걸으면서 최승철은 단팥빵을 우적우적 씹었다. 형 나 한 입만! 7반 교실에서 튀어나온 원우가 마른 팔을 뻗는 걸 가볍게 쳐낸 최승철이 그새 딱 한 입 남은 빵을 입 안에 몽땅 쑤셔 넣는다. 최승철의 빨간 입술이 우물우물 움직인다. 나는 허망한 원우의 손에 딸기우유를 쥐어주며 물었다.
“너는 입술이 어떻게 이렇게 빨개?”
“아, 그거.”
최승철이 소보로빵을 뜯으려다 말고 봉투에 다시 집어넣더니 교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최승철이 꺼낸 건 빨간색 니베아 립밤이었다. 이거 발라서 그래. 최승철은 아무렇지 않게 립밤을 주머니에 넣고 봉투를 뒤적여 소보로빵을 꺼냈다. 아, 존나 귀여웠다. 빨간색 니베아 립밤을 바르는 최승철.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술을 씰룩이고 말았다. 최승철이 너 왜 그래? 하는 데에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네가 너무 귀여워서 그렇다는 말을 하기엔, 썩 어울리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거 맛있다.”
최승철이 볼이 터져라 입 안에 빵을 욱여놓고 씩 웃었다. 나는, 입 안 쪽 살을 꾹 깨물었다. 걔가 웃는 게,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립밤을 발라서 빨간 입술이 올라가는 게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나는 최승철의 팔을 붙잡았다. 최승철이 빵을 먹으며 열심히 걷다 말고 나를 돌아본다. 승철아. 빵이 맛있는지 신난 얼굴을 한 최승철이 눈을 깜빡이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영화처럼, 세상이 멈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멈추고 최승철만 보였다. 최승철의 하얀 얼굴, 최승철의 까만 머리카락, 최승철의 커다란 눈, 복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투명한 갈색이 된 최승철의 눈동자,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 아래를 덮는 긴 속눈썹, 약간 아래로 내려온 빨간 입술. 확실히, 가만히 있을 일은 아니었다. 침이 넘어갔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게 보였을 거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최승철에게 말했다.
“승철아. 나 할 말 있는데.”
“뭔데?”
“지금 말고, 나중에 얘기할게.”
“뭔데 그래~”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나는 고개를 저으며 종 곧 치니까, 얼른 교실로 들어가자고 최승철을 재촉했다. 최승철은 언제 말 해 줄 거냐고 계속 찡찡거렸다. 빵이 입 안에 가득 차 발음이 뭉개진다. 나는 그것조차 귀엽다고 생각했다. 고삼 여름, 수능이 130일이 채 남지 않은 시점에, 나는 최승철을 좋아한다고 생각해버렸다.
“수능 치고 얘기해줄게.”
“왜?”
“그냥.”
“야, 지금 할 말 있다고 해 놓고 수능 치고 말해준다는 게 어딨냐! 야, 윤정한!”
나는 최승철을 2학년 층 복도에 버려두고 먼저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분명히 귀가 빨개졌을 것이다. 벌써 들키고 싶지 않았다. 뒤에서 최승철이 빠르게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예 달리기 시작했다. 윤정한! 뭐야! 뒤에서 들리는 최승철의 목소리에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나는 오랜만에 달리기를 해서 그런 걸 거라고, 계단을 두 칸씩 뛰어 올라가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절대로, 최승철 때문이 아니라고.